2007년 07월 15일
"친구", 노무현을 그린 듯한 나쁜 영화
부산 출신의 감독, 곽경택이 정말 잘 만든 이 영화는 거의 1천만명이라는 관객을 모아서 한국 최고의 흥행을 했던 영화입니다. 그 영화는 나름대로 멋있는(?) 삶을 살았던 건달의 인생을 그렸습니다. “고마해라, 마니 무긋다 아이가”라고 말하며 죽어가는 한 친구와, “거짓말하는 게 쪽팔리기에” 그 친구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고 법정에서 인정해버린 주인공의 모습을 통하여 남자의 멋있음을 보여준 영화였기에 수많은 건달들이 필수교양과목으로 수없이 보면서 눈물까지 흘렸다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에 대해 “쪽팔리기에” 거짓말 안하고 자신의 범행을 인정한 주인공을 무척이나 멋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대세라면 대세입니다. 그 영화 속에서 감독은 경상도 남자들을, 의리도 있고, 나름대로의 의지도 있으며, 멋있게도 그려 놓았습니다. 거기다 “조오련이 이기긋나? 물개가 이기긋나?”라는 되지도 않는 선문답을 대화 속에 삽입해 넣어 영화가 뭔가 인생의 철학을 다루고 있는 듯한 폼도 무지 잽니다. 그런데 과연 이 영화가 남성의 멋있음을 그린 영화일까요?
친구라는 영화를 다시 한번 다른 측면에서 분석해 봅시다. 그러면 영화를 만든 감독의 무의식까지 해부해 보는 결과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거짓말을 쪽팔려” 하는 폼생폼사라는 이름의 허위의식
유오성이 맡은 주인공이 멋있는 이유는 자신이 거짓말만 한다면 ‘살인 교사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살인을 교사했다는 인정을 하고, 실형을 산다는(영화적 이미지는 마치 사형이 된다는 느낌으로 끝납니다) 것입니다. 진실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이든지 쪽 안 팔림이 목숨보다도 귀중하다는 의미일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진실이 중요하고, 쪽 안팔림이 중요한 그 주인공의 가치관은 과연 진실이며 쪽팔리지 않음을 의미하는지를 영화전체를 통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영화 속의 주인공의 이름 보다는 배우의 이름을 편하게 사용합시다.)
유오성은 원래 은퇴한 건달의 아들이기에 쌈도 무지 잘합니다. 그리고 장의사의 아들 장동건 또한 쌈을 무지 잘하는데 유오성 보다는 못하는 거 같습니다. 장동건은 유오성에게 열등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내가 니 시다바리가?”라고 묻는 질문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장동건의 유오성에 대한 열등감이 이 영화의 긴장관계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유오성에 대한 장동건의 열등감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은 장동건이 유오성보다 쌈을 못한다는 열등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영화는 장동건이 유오성에 대한 개인적인 열등성을 조직이라는 다른 힘을 더하거나, 비인간적 처신이라는 야만성을 통해 극복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장동건의 열등감은 일종의 질투에 해당하며, 그 질투의 대상은 영화 속에서 ‘가장 모범적인 친구’인 상택입니다.
상택이란 친구는 친구라는 영화의 조연이지만 사실 영화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사의 아들인 곽경택 감독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 같은 상택은,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서, 건달들 같은 문제아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인간적인 인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이 영화는 곽경택 감독 자신과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만들어졌다고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삼각관계가 존재하는데, 이 영화의 삼각관계는 여자를 중간에 둔 삼각관계가 아니라 유오성을 중간에 둔 상택과 장동건의 삼각관계라는 겁니다. 유오성과 장동건은 건달이라는 특성으로서의 동질성을 지니고, 그 동질성 위에서 장동건은 자신보다도 한 수 위인 유오성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오성은 장동건을 동질성에 의한 친구 그것 이상으로 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 유오성은 상택에게는 그의 공항에 마중을 나갈 만큼 인간적인 친밀함을 표합니다. 이런 삼각관계에서 장동건의 상택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오성에 대한 반란이 이 영화의 갈등요소가 된다 이겁니다.
자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로 들어가 봅시다. 유오성이 상택에게 인간적인 친밀함을 표하게 되는 동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화 속에서 보이거나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하여지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한 이유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상택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상적인 부모의 유복한 집안의 자식이란 이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즉,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그런 집안의 자식이, 문제성 있는 집안의 (유오성의 아버지는 건달, 장동건의 아버지는 장의사라는 걸 기억하세요) 문제성 있는 자식들과 친하게 지내 준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이 상택에 대한 친밀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오성이 상택에 대한 관심과 우정은 상택이 유오성을 대하는 그것에 비해 매우 크고 깊으며, 유오성이 장동건에 대한 관심과 우정은 장동건이 유오성을 대하는 그것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는데, 이것이 장동건이 유오성을 떠나 독립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유오성을 넘어서 보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동기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문제성 있는 집안의 문제아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친하려고 한다는 것은 고마운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벌 떼처럼 일어나 “무슨 개 같은 소리냐”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바로 앞의 말을 당연한 듯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곽경택 감독은 그런 말을 의도적으로 하고 싶은데, 그 말을 대놓고 하는 것은 벌 떼와 같은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그와 같은 내용의 말을 영화 속에 녹여 숨겨놓았을까요? 아니면 감독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지도 몰랐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는 말의 뜻을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의 뜻이 결국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자란 곽경택 감독의 무의식에는“건달이나 장의사라는 문제성 있는 소외계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친구가 그들의 그룹에서 아무리 1등을 하더라도, 그들 그룹보다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에게 더욱 관심과 친밀함을 보인다”라는 사실이 자리 잡고 있기에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그런 모순이 아무런 문제처럼 보여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장동건이 유오성을 배신하게 되는 것은 유오성이 장동건 자신의 관심과 친밀함의 정도를 거부하고 오히려 상택이에게 더 관심과 친밀함을 보인다라는 배신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관객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그저 장동건이란 인물이 가진 열등감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해버리는데 사실 감독 또한 그런 식으로 영화를 끌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글의 문제성은, 감독마저도 개인적인 문제로 끌어가고 있는 영화를 놓고 무의식까지 끄집어내며 “장동건에 대한 유오성의 무관심이 유오성에 대한 장동건의 배신을 만들어 냈다”라는 해석까지를 하게 되는 이유를 말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감독이 정말 이만큼 멋있는 것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자신하면서 만들었을 대사인, “쪽팔린다 아이가”를 말한 유오성이. 죽음을 불사하면서도 쪽팔림을 면하고자 했던 멋있는 남자이기 이전에, 자신과 같은 ‘소외받는 계층’인 친구가 주는 관심과 친밀성보다도 부유한 친구를 무의식적으로 더 중시했던, 무의식적 신분상승 추구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좀 더 커다란 시각에서 보면 자기무시증 환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멋있고자 했던 유오성에게 있어 멋이란 하나의 허위의식일 뿐이며 그의 의식과 무의식 모두는 기존의 가치관의 노예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영화의 중심인물을 그렇게 그린 감독의 의식과 무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반영하고 있는 의식과 무의식이 무엇일까요? 바로 패권주의 입니다. “가진 것과 강한 것과 이긴 것이 아름답고 옳은 것이다”는 패권주의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패권주의는 그것에 굴종하는 것은 미덕이며 그것을, 장동건이 처럼, 극복하려는 것은 “바로 악이며 처벌받아도 당연하다”라는 사고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패권주의적 사고가 만연해 있기에 지극히 비정상적인 친구의 우애관계를 그리고 있는 ‘친구’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우리는 거기서 비정상성을 느끼며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면서 멋있다라고 느끼고 그것을 환호하게 됩니다. 이 영화가 최고의 흥행성적을 누렸다는 우리가 패권주의의 무의식에 얼마나 빠져 있는 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며, 사회적 역설인 것입니다.
패권주의는 가치를 전도시킨다.
영화 친구는 패권주의가 인간의 가치관을 얼마나 전도시키고 있는 지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구를 죽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죽음에 대한 어떠한 애도는 온데간데없고, 살인에 대한 합리화만 있습니다. 죽은 것은 이미 죽은 것, 산 사람이 중요 문제입니다. 죄악에 대한 단죄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고 이긴 자를 위해 숨겨주고 덮어주는 비리가 더 큰 우정이며 휴머니즘으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친구를 죽인 놈에게 회개를 요구하지 않고 죽인 놈을 살려낼 궁리만 하는 것이 상택이가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관객은 이런데서 휴머니즘을 느낍니다. 친구를 죽인 놈을 친구라고 감싸는 것이 휴머니즘이 아니고 “친구”가 아닐 진데, 이것이 오히려 휴머니즘으로 치장되고 “친구”로 정의될 만큼 기존의 가치는 전도됩니다. 이것은 우리사회가 이미 패권주의적 무의식에 의해서 가치가 전도되었기에 휴머니즘의 정 반대편에 서있는 부조리를 휴머니즘으로 느끼는 역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말하는 멋의 상징이요,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인, 죽인 놈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이유는 할 말을 잊게 합니다. 죄에 대한 회개에서 나오는 진실의 고백이 아닙니다. “쪽팔린다 아이가?”입니다. 이게 뭡니까? 죄의식이라곤 조금도 없는 것이 그 멋있음으로 방점이 찍힙니다. 오로지 자신의 자존심만이 스스로 죄를 인정할 만큼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 멋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런 기존의 가치가 완전히 전복된 상태에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 감동을 먹고 영화관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 넘 멋있었다. 니도 꼭 한번 봐라” 하며 그 영화보기를 권장했습니다. 그게 친구라는 영화가 흥행했던 우리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분명, 박정희와 전두환과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사건을 기억해내야 합니다. 사람을 죽여놓고도, 죽인 것은 이미 끝난 일이니, 살인 사건 자체에 대해 합리화를 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과, 이 친구라는 영화는 너무나 흡사합니다. “그것은(광주에서의 살인은) 구국의 결단이었다”라는 말은 “쪽팔린다 아이가”의 이 두말은 공통점은‘생명을 말살한 것에 대한 죄의식’은 조금도 없고, ‘생명을 말살한 행위’를 합리화를 넘어 그것을 영웅화하는 패권주의적인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패권주의의 본질은 패권주의를 추구하고 그 패권주의에 의하여 이익을 얻는 자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패권주의적인 일련의 행동 양식과 그것을 오히려 영웅시하고 멋있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집단 무의식에 의해서 형성되어지고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패권주의는 일반적 현상인데 왜 영남 패권주의인가?
약한 자와 피해자에 대한 동정과 배려보다는 가해자와 강한 자를 미화시키고 합리화시키는 패권주의는 집단마다, 지역마다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친구와 같은 영화의 이야기는 부산에서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목포며 광주며 청주며 서울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에 불가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패권주의를 이야기할 때 왜 영남패권주의를 말하게 될까요. 왜 호남 패권주의나 충청 패권주의를 말하지는 않고 영남 패권주의만을 강조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영남 패권주의를 부정하고자 하는 지식인이나 논객들은 영남패권주의를 호남의 지역주의자들이 호남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영남패권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호남의 지역주의나 영남의 패권주의라는 개념을 동일시 야만적 오류를 범해 버립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의 지역주의와 영남의 패권주의는 그 본질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남의 패권주의는 지역적 차별성에만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남이 다른 지방에 대해 지역적 차별성을 가질 만큼 혜택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영남 패권주의의 원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지역에의 개발과 혜택을 통하여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패권주의는 계급적 차별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에서 지역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친구라는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상택은 상류계급입니다. 반면 유오성과 장동건은 하류계급입니다. 둘 중에 유오성은 힘(폭력)의 우위에 있기에 유오성이 상류에 해당합니다. 같은 상류이지만 상택과 유오성은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합니다. 상택은 겉으로는 계급적 우위와 도덕성까지도 갖추고 있는 상류이며 유오성은 도덕성도 없는 상류입니다. 그러기에 유오성의 계급적 상승과 도덕성의 확보는 상택으로의 친밀성에 의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유오성은 그 스스로 힘을 가지고 있는 이상 상택만이 중요합니다. 그에게는 장동건은 하나도 중요한 주체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따라와야만 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겁니다.
영남의 패권주의는 영남이라는 지역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상류계급을 이루고 있는 집단이 영남 출신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권력이 있어도 정당성(도덕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상택에게 무조건적으로 가까워지려고 하는 유오성처럼, 영남의 기득권 집단에게 인정을 받고 영원한 상류계급으로 상승하려는 데서 패권주의는 자라나게 됩니다. 영원한 상류계급으로의 상승은 한 두 번의 권력과 이권과의 한 두번의 거래로 이루어지는데 그치지 않고 혼맥 등을 통하여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거래관계를 틀어 나감으로써 공고하게 그 계급적 기반을 다져나가게 됩니다.
이처럼 영남 패권주의는 계급적 특성을 가진 패권주의와 영남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친족주의적 지역주의라는 세 가지의 특성을 중첩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계급적 특성과 지역성 그리고 혼맥을 통한 친족적 성격을 고루 갖춘 영남패권주의는 그 패권주의적 기득권이 반영구적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내고, “이 사라지지 않을 권력과 이권의 실재(實在)"에 대하여 일반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심리를 만들어 내며, 이 무조건적 복종심리는 종교적 실재에 대한 복종과도 같은 성격으로서(실재에 대한 복종은 군사적 권위에 대한 복종과 거의 유사합니다), 복종하는 자로 하여금 그 복종 자체에 스스로 수치심이 아닌 자부심을 가지게 합니다. 기독교 신자나 불교 신자가 기독교의 신, 야웨나 불교의 신인 부다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그들의 깊은 신앙의 결과라고 칭송하듯이, 패권주의적 실재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정과 무의식적 복종 또한 그 지역의 계급적 차이와 관계없이 그들의 자부심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진 과정이며 결과가 바로 영남패권주의인 것입니다. 따라서 유오성처럼 상택과 가까워지려 함은 친밀하고자 하는 개인적 감정의 발로라고 볼 수 있으나, 같은 계급인 장동건이 보여주는 애정을 무시하고 상택에게 보여주는 그의 애정은 무의식적인 패권주의로의 지향으로 밖에 설명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남패권주의의 의하여 그 이득을 얻은 먹은 적이 없고, 경제난으로 수많은 고통을 받는 하층계급에 속하고, 주어진 현실에 불만을 가지는 저항적 인물들이 영남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 넘는다면서, “그것이 어떻게 영남 전체를 싸잡아 규정하는 영남패권주의냐”라는 반문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패권주의는 패권에 의한 기득집단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주의가 아니라, 반인간적이고 야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환호하는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무의식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이해하신다면 감히 반론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패권주의 무의식에 우리가 사로잡혀있기에 우리는 반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우애를 그린 친구라는 영화를 보고, 그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멋있다고 환호하게 되면서, 한국 최고의 흥행기록을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반면 그 영화를 보고 이런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영화가 있냐고 느끼거나 무언가 거북하다고 여기시는 분들은 자신의 의식이 깨어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노무현과 영남 패권주의라는 이름의 야만
친구의 유오성과 같은 대표적 인물을 현실에서 찾으라면, 바로 대통령 노무현을 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상고밖에 나오지 못한 하층계급 출신으로서 대통령까지 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그 나름의 조폭세계에서 제 1인자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는 1인자가 되고나서도 그들 1인자로 만들어 준 동급의 계급보다는 그가 여기는 상류층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더 많은 무의식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도 상택을 향한 유오성과 닮았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자신과 함께 해왔지만, 자기의 애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장동건을 죽이고는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고 자신의 폼생폼사만 중요하게 여기는 유오성처럼, 민주당을 가차 없이 분열시켜버리면서 지 잘났다고 정치개혁을 부르짖습니다. 그는 스스로 올바르고 스스로 성공했고, 스스로 개혁이기에, 그에게 투정하거나 그가 하는 일을 질투하는 일은 반역이며 죽어 마땅한 일입니다. 그가 영남으로 가려는데 그의 바짓가랑일 잡는 것은 배신이며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말아야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없애길 원하는 한나라당과는 상생을 할 수는 있어도 그들 1인자로 만든 민주당은 죽이는 게 당연합니다. 지가 하고 싶은 것에 불만을 품는 것, 그것이 바로 배신이며 반역이며 죽을 짓이니까요.
그런 의식에 사로잡혀있는 패권주의자들이기에 “민주당 뽑으면 한나라당 도와주는 꼴이 된다”라고 그는 용렬하게 부르짓을 수 있으며,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 말에 박수치며 환호합니다. 그는 대통령직의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인 탄핵의결 앞에서 자신의 비도덕성에 대한 참회보다는 폼생폼사의 조폭적 멋을 부리기 위해 “쪽팔린다 아이가”하며 사과를 거부합니다. 이런 노무현은 뭘 믿는 것은 단 하나 영남패권주의라는 무의식입니다. 그는 친구를 보고 환호했던 이나라의 영화관객들 처럼, 도덕적 의식 보다는 패권적 폼생폼사에 더 환호하는 노빠들과 패권적 무의식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영남에 대한 그의 집착은 계속된다..
그의 사랑을 얻고자 그에게 질투하는 자..
바로 반역이며 그 반역은 곧 죽음이다,
이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지금의 2인자가 처한 운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노무현을 위해서, 노무현의 1인자 됨을 위하여 노무현을 사랑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유오성이 상택만을 쳐다보듯, 영남을 쳐다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영삼시계를 들고 흔들었듯이, 한나라 당 혁규를 총리시키고, 다음 대선 주자로는 영남이 자기를 진정성을 인정하고 받아줄 수 있는 인물을 찾아 나설 겁니다.
그리하여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으며, 사랑하고, 사랑할 것인데”라고 장동건과 같은 입장에 처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아이큐 80만 되어도 알아챌 것입니다. 그 자가 처한 운명은 영화 친구에 나와있습니다. 그가 할 말은 “고마해라. 마니 묵었다 아이가” 할 것 밖에 없습니다.
민주당이 반역의 딱지를 맞고 칼을 맞았습니다. 민주당은 “고마해라 마니 묵었다 아이가”라는 폼나는 말도 못하고 넘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숨결이 끊어질 때까지 사시미 칼을 들고 날뛰는 노빠들을 보세요. 지금 배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빗물을 붉게 물들이며 하수구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노빠들은 칼로 배를 찔러댑니다. “고마해라 마니 묵었다 아이가”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는 배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도 찔러대고 있는 것은 등을 찌르고 배를 찔렀는데도 살아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입니다.
그 다음 유오성의 부하들에게 칼을 맞으며 “고마해라 마니 묵었다 아이가”라고 피를 흘리며 죽어갈 다음의 장동건은 누굴일 지, 정치판에서 벌어질 새로운 영화 친구가 몹시 기다려집니다. 그것도 과연 흥행에 성공할는지 모르지만.. 저는 두 번 다시 그런 패륜적인 한국 최고의 나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가득합니다.
# by | 2007/07/15 11:37 | 영화이야기 | 트랙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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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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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있는 그대로... 그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이 발휘하는 행동들을...
그야말로 현실을 영화에다 실어 놓는...
글쎄요... 제가 경상도 사람이라서 곽경택 씨의 영화 흐름에 동의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너무 깊이 해석하려 들며는 ...
이것 저것 가져다 붙여서 상상과도 비슷한 해석이 나올 수 도 있겠죠...
제가 봤을 때는 글쓴 분은 너무 생각이 많고, 그 어떤 것들도
비판적으로만, 보려 하는 것 같네요....
저는 '친구'란 영화를 봤을 때 전혀 현 정권 상황과 이을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정말 진짜 같다......너무 진짜 같다.......
그저 감동만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닌...
실제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요~~~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나름 따져 보고 영화를 보는 사람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곽경택 감독이 현 정권을 은유적으로 비판하여
영화에 집어 넣었던 것이라곤 보이지 않습니다..
글쓴 분의 과도 해석으로 보이네요...
'쪽 팔리서.....' 이 대사가 그렇게 무책임하게만 들립니까???
그 내면에 붙어있는 뜻들은 안 보입니까???
진정 이해가 안되나요???
제 정말 친한 친구가 전라도 사람이고, 저는 경상도 출신인데...
갑자기 지역차가 느껴네네요......
참 지역 차이가 멀고도 먼 것이네요....
위에 댓글쓰신분 나름대로 영화를 따져본다는 사람이, 그렇게 무뇌적인 소릴 하는지...
친구가 2001년도에 나왔는데 노무현 비판을 할리가 없잖아요.
곽경택씨 역시 조폭들과 친한걸로 알고, 비열한 거리에서도 곽경택 얘기가 나왔죠. 실제로 조폭들 돈을 받고 영화를찍는 감독도 있고요.
글쓰신분은 참 영화보는 시각이 너무 유치한거 같네요.
영화에는 영화적 언어란게 있는겁니다